시험지를 받자마자 펜을 헛돌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머리는 좋은데, 처음 보는 유형 앞에서 그대로 굳어버려요. 반대로 평소 조용하던 아이가 척척 풀어냅니다. 비결을 물으면 시시해요. "어제 오답노트 펴고 '이 유형 나오면 이렇게 푼다'를 미리 적어놨어요." 시험은 시험장에서 갈리는 것 같지만, 사실 전날 밤 책상에서 이미 갈립니다.
원장님은 이 장면을 매일 보시죠. 그런데 정작 원장님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험 앞에서는 그 반대로 하실 때가 많아요. 상담이라는 시험이요. 저도 그랬습니다. 정원 한 자리 빈 날, 준비랄 것 없이 앉아 즉흥으로 받아쳤어요. "조금 비싸네요"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그럼 등록비 빼드릴게요"가 튀어나왔죠. 등록은 받았는데, 제가 뭘 왜 내준 건지 저조차 설명 못 했습니다. 시험장에서 머리만 굴린 거예요.
이 책은 그 빈 책상을 가리켰습니다. 저자 류재언은 기업 분쟁과 계약을 다루는 변호사이고, 하버드 로스쿨 협상 프로그램을 수료했어요. 협상 책을 뒤지다 보면 벽을 만납니다. 좋은 책은 대개 서양 것이고 사례는 M&A나 외교라, 읽고 나면 내일 상담실에서 뭘 할지는 손에 안 잡혀요. 이 책의 한 수가 거기 있습니다. 흩어진 협상학 이론 열두 가지를 'NPS'라는 준비 시트 한 장으로 묶었거든요. 목표·욕구·기준·대안·배트나 같은 걸, 협상 전날 책상에서 직접 채우는 빈칸으로 만든 겁니다. 시험 잘 보는 아이의 오답노트를, 협상용으로 바꿔놓은 셈이죠.
저자가 못 박는 비율이 있어요. 협상의 성패는 준비 80, 테이블 20으로 갈린다. 협상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책상에서 준비한 것의 결과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날 제가 즉흥으로 등록비를 깎은 것도, 책상에서 "수강료 말이 나오면 나는 무엇을 어떤 조건으로 내줄 수 있나"를 단 한 번도 안 적어봤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니 다음 상담 전날, A4 한 장 맨 위에 딱 한 줄만 적어두세요. "이 상담에서 절대 양보 안 할 것 하나, 양보할 수 있는 것 둘."
준비표에서 저자가 반드시 채우라는 칸이 '욕구'예요. 상대가 입으로 말하는 '요구'("비싸요")는 빙산의 일각이고, 그 아래 진짜 '욕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손정의가 스티브 잡스와 협상할 때, 잡스가 겉으로 말한 조건이 아니라 속으로 안고 있던 골칫거리를 정확히 건드렸다는 일화가 나와요. 그 디테일은 책에서 직접 보시는 게 좋습니다. 핵심은, 그가 그걸 테이블에서 즉흥으로 알아챈 게 아니라 미리 헤아려 준비해 갔다는 점이에요. 그러니 상담 준비표에도 칸을 하나 더 그으세요. "이 어머니가 입으로 말하는 것"과 "진짜 불안해하는 것"을 나란히요. "비싸요" 밑엔 보통 "이 돈 쓸 만큼 효과가 있을까"라는 불안이 깔려 있습니다.
준비표 맨 아래엔 '배트나' 칸이 있어요. 쉽게 말하면 이 협상이 깨지면 남는 차선책이요. 이것도 시험과 같아요. "이 문제 못 풀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는 옆 문제까지 망치지만, "안 풀리면 넘기고 뒤에서 채운다"는 차선책을 정해둔 아이는 안 흔들립니다. 상담도 같아서, "이 한 자리 못 채우면 끝장"이라 느끼면 표정에 절박함이 새고 그 순간 끌려가요.
다만 이 책은 변호사가 쓴 책이라 사례가 기업 분쟁·계약 쪽으로 기울어, 학원 상담이라는 작고 정서적인 협상엔 원장님이 한 번 번역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표 채우는 게 체질에 안 맞는 분껜 거추장스러울 수 있고요. 그리고 '준비'엔 강하지만, 테이블에서 상대 감정이 격해졌을 때 실시간으로 다루는 법은 얇습니다. 이 책은 준비표를 쥐여주는 책이지 즉석 대응 매뉴얼은 아니에요.
협상의 승부는 테이블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 전날 밤, 책상에서 이미 갈립니다.
그러니 다음 상담 전날, A4 한 장에 세 칸만 그어두세요. "내가 안 내줄 것 하나 / 이 어머니의 진짜 불안 하나 / 등록이 깨져도 나의 차선책 하나." 이 한 장이, 시험장에서 머리만 굴리던 어제의 상담을 바꿉니다.
| 류재언 협상 바이블 — 류재언 변호사의 협상 바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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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재언 저 |
| 한스미디어 · 2018 |
"협상의 승부는 테이블에서 나지 않습니다. 그 전날 밤, 책상에서 이미 갈립니다."